내 마지막 날의 생각

최근 접한 어느 책에서는 사색으로 스스로를 수양하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는 가정을 하고 사색을 하는 훈련을 권하고 있다. 참 좋은 생각이라고 본다. 누구든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상정할 때는, 쓸때 없는 잡념보다는 필수적인 생각만을 우선적으로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날 때도 비슷한 효과가 있다. 인생은 시간의 함수이기에, 그 마감 시간의 임박만큼 최선을 요구하는 계기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같은 훈련을 하는 것은 내 자신의 소양을 쌓는 교육적 효과에 못지 않게 실질적 효과가 있다. 나이나 건강의 여하에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소멸의 가능성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가장 요긴한 것부터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산다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적게 남기고 정리된 상태에서 떠날 확률이 높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이런 생각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고, 나 자신도 과거에 이런 생각 없이 살아 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태도는 솔직히 말해서 경솔하다.

각자 종교나 영성(靈性:spirituality)에 대해 가진 태도에 따라 세상 마지막 날에 임하는 자세는 다르겠지만, 시간의 압박 속에서 종교적 생각을 진전하거나 바꾸기 보다는 실천적인 일들에 몰입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9.11. 테러가 자행되던 날, 비행기에 탄 채 이미 자신이 충돌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아 채린 소수의 사람들, 그리고 불타는 빌딩에 갇혀 생존의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한 것은 휴대전화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그렇게 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거의 모두가 그런 메시지를 마음 속으로 보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수천 명의 인간을 희생시켜 가장 보편적인 최고의 가치가 사랑이란 것을 보여준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허공에 뜬 채 서로의 사랑에 의존하여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마지막 순간에 사랑한다는 것을 말로 표현할 기회가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평소에 나의 사랑을 의심할 바 없이 못 박아 놓아야 한다. 결국 사랑하는 배우자나 부모 형제 친지들에 대해 평소의 태도에 흐트러짐이 별로 없던 사람들은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루에도 남편이나 아내에게 “I love you”를 수차 발설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반응이 염려되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불안할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수험생처럼.

아무리 인생을 모범적으로 살아 온 사람들이라 해도 잘못이나 오해를 전혀 남기지 않는 경우를 상상하기 어렵다. 인생은 그처럼 복잡하고 생존은 때로 무리한 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라 본다. 따라서 “사랑한다” 다음에 요긴한 것이 “미안하다”가 아닌가 한다. 평소에 쉽게 그런 표현을 해 온 사람들은 마음이 가벼울 것이다. 굳어진 마음의 소유자들, 마음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몸이 따라 주지 않던 사람들은, 마지막 날을 후회하면서 보내야 한다.

“용서한다”는 “미안하다”와 대칭되는 것으로서 방향만 다르지 같다. 인간이 남을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마저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의 용서의 표시가 상대방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를 무수히 기도 속에서 외쳐 온 우리지만 불행히도 용서에 훈련이 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묶어 놓은 채 떠나면 그들을 해치는 것이다.

물론, 사랑하거나 미안한 것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혹시 자신의 결정이나 행위로 크게 잘못된 것을 시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런 것을 이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해치워야 하지 않도록 그런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놓고 미리 해결해 놓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수십년 살아 오면서 만든 업보가 많고 길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의 일정을 잡기 위한 훈련은 결국 일생의 방향을 잡고 그에 매진하는 방도를 발견하는 훈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의 저자가 그런 훈련을 권한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날과 일생의 차이를 연장하면 순간과 영원의 차이가 된다. 영원도 순간의 모임에 불과하고 우리는 각 순간을 하나 씩 살아 갈 수 있을 뿐, 한꺼번에 영원이나 그 부분인 짧은 인생을 누릴 능력도 자격도 없다. 결국 지금 나에게 유효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이 순간을 붙잡는 것이 영원을 붙잡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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